이 글에서 말하는 國漢混用은, 한글 倂記 없이 漢字語에는 漢字만 써 놓은 것을 뜻합니다.
(한자는 순서대로 "국한혼용, 병기, 한자어, 한자" 입니다.)
원래 민감한 주제는 건드리지 않는 게 맞지만 이건 별 문제가 안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정치 얘기는 안 나오잖아?
어디까지나 소수 의견이지만, 대한민국의 실질 문해율 (literacy proficiency : 문해 능숙도) 이 생각보다 낮은 원인을 한글 전용 정책에 돌리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리고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국한혼용이죠. 개중에는 한글전용이 좌파를 키운다니, 한자 교육이 창의성을 길러준다니 하는 헛소리에 가까운 의견도 있습니다만.
해당 의견이 맞는 말이냐는 차치하고서도, 문제는 이것입니다.
현시점에서 국한혼용체가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사회인 만큼, 언어를 표기하는 방식을 바꾸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국한혼용으로 넘어가는 데 넘어야 할 장애물도 모두 여기에 존재하고요. 결국 대중이 평소 생활에서 한자를 써 주겠냐는 점이 문제입니다.
한자 문맹 세대
가장 큰 장벽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연령대 대부분이 한자를 잘 모릅니다. (사실 작성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 한자도 전부 검색해서 썼고.) 이런 상태에서 특정한 신문, 출판물, 유튜브 채널이 국한혼용을 강행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걸 보겠습니까? 굳이 본다고 한자 공부를 할 바에는 다른 걸 찾습니다. 출판물에 한자를 강제로 넣으라고 하기에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돼서 할 수도 없죠. 그나마 건드릴 수 있는 건 교과서와 각종 공식 시험 (수능, 공무원 공채, 교과서 등) 정도인데, 수능 국어 지문을 국한혼용으로 바꾸겠다는 말을 하는 평가원장이 살아남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한편 대한민국의 교육 체계는 소수의 엘리트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을 기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국가 주도로 학생의 학습 부담을 가중시킬지는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교육 체계가 꼭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쓰기 번거로움
한자를 쓰려면 일단 한글로 해당 독음을 치고, 한자 변환을 해야 합니다. 이럴 바에는 그냥 한글만 치고 알아서 알아보게 내버려 두는 쪽이 더 편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 문제 때문에라도 인터넷상에서는 한자를 보기 어려울 겁니다. 대안으로 많이들 제시하는 게 일본식 변환 방법인데, 그래봤자 한글로 치고 끝내는 것에 비하면 오래 걸립니다.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향이 없었다면 국한혼용이 여전히 쓰였을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아마 인터넷 커뮤니티가 세를 불리는 과정에서 한자의 존재감이 조금씩 옅어졌을 것이라 봅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청년층이 사용하는 커뮤니티는 장문의 글을 쓰며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채팅 치듯이 빨리 글을 쓰는 기조가 되었거든요. 글의 호흡이 짧아졌다고나 할까요.
한편 이 문제는 제가 기준으로 제시했던 "한자어를 한자로만 표기" 말고도, 한자음 내지 한자를 병기하는 표기법에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아니, 더 심각하죠. 똑같은 걸 두 번 써야 하니까요.
한자를 꼭 써야 하는가?
한자문화권 국가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북한>이고, 이 중에서 한자를 일상적으로 쓰는 국가는 중국, 대만, 일본입니다.
중국과 대만은 애초에 본인들 문자니까 쓰는 것이고 (중국은 한자를 포기하면 지역 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중국어 방언은 말이 방언이지 유럽이었으면 다른 언어로 분류되었을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일본은 한자의 압축성과 표기할 수 있는 음가의 한계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한자 하나에 한글 한 자'라서 압축성을 따질 것이 없고, 음가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은 게 (과거에) 문제가 될 정도였으며, 동음이의어 문제도 여간해서는 맥락을 보면 해결이 가능합니다. 물론 '연패' (연달아 우승 / 연달아 패배) 같은 예외는 있습니다만 자주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는 한자를 병기하거나, 뜻을 풀어서 써 주거나 하면 되는 일이에요.
※ 여기서 과거란, 타자기와 활자 인쇄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글 구조 상 의외로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현재는 아예 모든 한글 형태를 따로 저장해놓고 있고요.
결론
대한민국에서 실질 문해율이 가장 높은 세대는 '한글 전용 세대'에 포함되는 1980~1990년대 출생자 구간입니다. 그 이전 세대는 국가 체계가 미숙하고 국민이 빈곤했던 점이 문제였고, 그 이후 세대는 보라는 책은 안 보고 유튜브 등 직관적이고 자극적인 매체만 접하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단순히 한자 교육 문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애초에 읽기 능력은 문서를 많이 읽어야 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단어의 뜻이나 단어를 이루는 한자는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학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글 탓을 하기보다는 바닥을 치는 독서율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자 교육 강화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분이 많은데, 이론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생활에서 한자를 얼마나 쓰죠? 안 쓰면 까먹습니다. 초등학생 자녀를 학원에 끌고 가 한자 5급을 따게 하든, 천자문을 외우게 하든 안 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수능에 한자 안 나오면 애들이 공부를 제대로 할 리도 없고 말이죠. 실제로 저도 (1994년생) 교육 과정에 한자와 한문이 있긴 했지만 해당 과목을 진지하게 공부해서 시험을 치는 친구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 읽으신 분들. 여기 한자어가 상당히 많이 쓰여 있는데 이걸 전부 한자로 바꿔놓으면 진짜로 읽기 편하십니까? 더 빨리 읽고 이해할 수 있나요? 정말로요?